'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 울려 퍼지고, 그와 동시에 가로 10미터 세로 2미터의 화폭에 파란색과 초록색이 조화를 이룬 인상적인 풍경화가 완성되어간다'
상상이 가십니까? 이 진귀한 광경이 지난 19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2008 교향악축제-경기필'의 공연에서 펼쳐졌습니다.
[사진=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공]
지휘는 이분, 금난새 경기필 음악감독이 맡았습니다. 유명하시죠. 재미있는 해설로 클래식음악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청중과 함께 호흡하는 무대를 만들기로요. 2006년 9월에 경기필의 상임지휘자이자 예술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금감독이 부임한 뒤, 경기필의 음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번 교향악축제는 금감독이 취임한 후 처음으로 경기필과 함께 오르는 무대였습니다. 그만큼 기대가 컸죠.
첫 레퍼토리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습니다. 협연자는 송윤신씨.
2007년에 바이올리니스트 송윤신을 제1회 스트라디바리우스 국제바이올린 경연대회에서 우승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곡이었던만큼 송윤신은 매우 자신있는 활놀림으로 연주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음색으로 1악장부터 3악장까지 매우 숙련된 연주를 들려준 바이올리니스트 송윤신에 못지않게 협연자와의 완벽한 호흡을 보여준 경기필과 금난새의 서포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잠시 휴식 후, 드디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차례가 왔습니다. "오늘은 금선생님이 마이크를 안잡고 지나치려나" 했는데...역시나^^;;
[사진=경기필 제공] 마이크는 내운명
뭐,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올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을 뿐^^;
여전히 재치만발이셨습니다. 그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좌중들의 웃음을 이끌어내시는 능력은 역시 탁월하셨습니다.
금감독의 소개로 바로 이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음악적 선율을 무대 위에서 색채로 표현하는 프랑스 화가, 제라르 에코노모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보는 음악(music to see), 듣는 그림(paintng to hear)"이라는 새로운 컨셉을 개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1시간동안 무대 위에서, 가로 10미터 세로 2미터의 캔버스에 음악적 선율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70대입니다. 그리고 154cm의 단신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보무가 당당한지, 그런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였지요. 금감독의 소개와 동시에 무덤덤히 무대에 오른 그는 일단 목에 건 수건을 휙 구석에 던지는 것으로 관객들과의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웃음이 터졌죠.
선율이 흐르자마자 제라르 에코노모스는 큰 붓에 물감을 한껏 발라 오케스트라 뒤에 마련된 거대한 캔버스에 휘둘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크레센도를 연주하거나 인상적인 멜로디를 연주할 때마다 제라르는 붓을 들지 않은 왼손을 음악에 맞춰 흔들었습니다. 그림이 거의 완성된 4악장에서는 자신이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된 듯 박자에 맞춰 캔버스를 강하게 두드리는 호기(?)를 보여주기도 했죠.
처음에는 추상화를 그리려나?했는데, 시간이 점점 지나갈수록 깊은 산속의 옹달샘과 빨간 꽃들이 캔버스에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조마조마했던 건, 곡에 딱 맞춰서 그림이 완성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다행히 오케스트라가 4악장에 걸친 강렬한 여정을 마쳤을 때, 제라르의 캔버스에는 초록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풍경화가 담겨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뒤, 그림이 잘 보이시나요?^^
이날 연주회는 그림만 돋보인 건 아니었습니다. 멋진 풍경화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금난새와 경기필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연주였습니다. 잘 훈련되고 균형잡힌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에 유려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금난새의 지휘, 강렬한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연타는 풍경화보다는 음악에 신경 써 달라는 무언의 시위처럼 강한 호소력을 청중들에게 전달했죠. 4악장에서 제라르가 캔버스를 연이어 두드린 것은 훌륭한 연주에 정신을 빼앗긴 청중들의 관심을 자신의 그림에 조금이라도 끌어보려는 재기넘치는 반항이 아니었을까요.
자칫 두 마리의 토끼를 다 놓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 이 날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습니다. 연주를 마친 뒤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경기필의 단원들도 활을 흔들어대며 화가 제라르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될까요. 음악과 미술이 동일한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걸작으로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공감각의 밤'이었다고요.
연주회가 끝난 뒤의 모습. 실제로 보면 그림이 더 아름다운데. 이렇게밖에 못 전해드려 안타깝네요. 사진 찍는 솜씨가 그리 훌륭하지 않은 터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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